군(君)의 이름은 신언(臣彦)이며 자(字)는 사미(士美)이시니 교동이 그의 본관(本貫)이다. 먼 조상이신 빈(邠)께서 고려 조정에 벼슬하셔서 학사(學士)가 되고 재주와 명성이 세상에 떨치셨는데 함창현(咸昌縣 : 지금 경북 尚州郡 咸昌面)으로 귀양 오셨다가 돌아가시매 자손들이 살게 되었다. 군(君)의 증조부 이름은 사휴(士休)요, 조부의 이름은 복용(福庸)이시니 벼슬이 사예(司藝)요, 아버지의 이름은 승손(承孫)이시니 경서에 밝으셔서(明經術) 마침내 문학에 널리 아셨다. 어머니는 박씨이시니 성품이 유순하고 또 엄하셨다. 공(公)이 어려서 아버님을 여윈 것을 애석히 여겨 옳은 방향으로써 가르치셨고 장성함에 이르러 힘써 배워서 나이가 三十七세에 이르러 경오년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그 뒤에 여러번 과거를 보았으나 안타깝게 급제가 되지 못하매 세상에 뜻을 두지 않고 드디어 정자를 짓고 연못을 파서 고기를 기르면서 날마다 친구들과 함께 시(詩)를 읊고 술잔을 기울이면서 스스로 즐기시매 사람들이 이 고장의 노인 어른으로 대접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인생이 나서 六十을 살았다면 일찍 가는 것이 아닌데 더구나 내 이미 여기에서 여러 해를 더 살지 않았느냐』고 하더니 하루는 급히 관(棺)을 만들라고 함으로 온 집안이 놀래고 이상히 여기되 그 뜻을 알지 못하더니 다음날부터 과연 조금씩 아프기 시작하여 점점 병세가 심하여 밤에 돌아가시니 가히 천명을 아는 사람이라 하겠다. 성화(成化) 갑오년(서기一四七四년)에 나시어 향년 六十三세를 사시었다. 군의 성품이 낙천적이었고 큰 그릇이었으나 운수가 기이하여 시골에서 늙어서 돌아갔으니 슬프다! 의인(宜人) 박씨(부인을 말함)는 곧 생원(生員)인 삼산(三山)의 따님으로 어진 덕이 있었고 공보다 먼저 무자년 五월에 돌아가서 양범산(陽範山)에 장사 지냈더니 그 아들인 진사(進士) 기 (紀)가 부모님을 따로따로 모실 수 없다 하여 묘를 옮겨 고을의 서쪽 건지산(巾之山) 부군의 묘소 감좌이향(坎坐离向)에 합폄(袝)하였다. 二남一녀를 두시매 큰아들은 강(綱)이니 일찍 죽어서 손이 없고 작은 아들은 기(紀)이니 二남을 낳았는데 아직 어리고 딸은 권성(權誠)에게서 二남二녀를 두었는데 모두 나이가 어리다. 서기 一五三六년 資憲大夫前行刑曹判書 蔡紹權 撰 鄉人 洪復昌 書 〔譯者註〕 蔡紹權의 약력 : 本貫 仁川 號拙齋 서기 一五○六年(연산군十二년) 문과에 급제한 후 三司의 여러 관직을 역임. 중종 때 형조판서(이 비문은 距今四五○여년 전의 것임)